풀이 눕는다
🔖 상상력이 부족한 내 머릿속에서 세상은 아주 단조롭고 무엇이든 예측 가능한 것이었다. 하지만 진짜 세상은 번번이 내 단순한 예상을 가볍게 뛰어넘어 무지갯빛으로 펼쳐졌다. 그래서 나는 온갖 것들에 쉽게 매혹되고 쉽게 감동했던 것이다. 자신의 마음에 이미 천국이 있는 인간이라면, 천국의 모든 색깔과 지옥의 모든 냄새를 자신의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그런 인간이라면, 결코 나처럼 온 세상에 쉽게 매혹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모든 것에 쉽게 뛰어들고 어디든지 쫓아가지 않았을 것이다. 풀은 아마도 그런 사람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렇지 못했기에 모든 것에 쉽게 매혹되고 길 잃은 강아지처럼 아무나 쫓아갔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사려 깊은 애정에 이르지 못했다.
🔖 Air, , ‘The Virgin Suicides’
🔖 내가 풀의 그림을 좋아할 수밖에 없었던 건, 그 형태와 색을 감싸고 있던 어떤 다정함이었다. … 왜냐하면 나는 위로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눈을 꼭 감고 그 다정함에 내 몸을 휙 던졌고, 그렇게 그 다정함이 감추고 있는 몇 가지 사소한 것들에서 눈을 돌렸다. 그가 그 다정함을 유지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버티고 있다는 사실을 무시해버렸다.
🔖 모든 게 선명해졌다. 나는 시집들을 모두 던져버렸다. 여전히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지만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았다.
— 앞으로 세 달 동안 하루에 한 편씩 백 편 쓸 거야.
— 오.
— 네 그림같이 죽이는 시를 쓸 거야.
🔖 그날 저녁 나는 술에 취해 울며 풀에게 나가면 자살하겠다고 협박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사과하는 마음을 담아 하트 모양의 오므라이스를 만들어주었다. 나는 한 손에 숟가락을 들고 선언했다. 오늘부터 달라질 거야. 다시 글을 쓸 거야. 책도 읽을 거야. 그리고 산책도 할 거야. 빨래도 하고 청소도 할 거야. 그리고 술도 끊을 거야. 아니……. 끊을 수는 없고 줄일 거야. 진짜. 많이 줄일 거야. 선언 끝.
🔖 왜냐하면 누군가 날 구해줄 테니까. 그리고 난 그게 풀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